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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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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의 도시 안산② '장미화가 성백주'
    미술의 도시 안산② '장미화가 성백주'
    제453호(2018.4.25.) 순수한 나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나는 그린다.  ​안산은 조선후기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 선생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미술의 도시이다. 안산은 예로부터 물 좋고, 산 좋아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예술가들이 많은 예향의 도시였다.단원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을 비롯해 다양한 미술 인프라가 구축 되어 있는 미술의 도시 안산을 소개한다.​ ​순수한 나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나는 그린다안산을 대표하는 미술가 ‘장미화가 성백주’​  ​밖에서 바라본 안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업 도시일뿐이지만 안산에 살아 본 사람들은 안다. 안산이 얼마나 살기 좋은 도시인지. 예로부터 물 좋고, 산 좋아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안산은 예술가들이 많은 예향의 도시였다. 근대 산업화로 급성장한 회색도시 안산에 예술의 기운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예술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지고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도 늘어나면서 안산에 정착한 예술가들도 적지 않다. 안산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예술인들은 안산을 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귀중한 자원이다. 안산을 대표하는 현대화가 성백주 화백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와 작품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본오동 한양아파트에살고 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창작활동 중인 성 화백은 ‘장미화가’로 잘 알려진 화가다. 1927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해방 후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성 화백은 “당시에는 음악이나 미술을 잘하는 교사를 보물로 생각했다. 나는 미술을 잘 해서 다른 교사와 서로 시간을 바꿔가며 수업을 하곤 했다”며 교사 시절을 떠올렸다. 그림 좋아하던 교사였던 그는 1959년 국립도서관 화랑에서 열린 ‘제작동인전’에 참가하면서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백발의 화백은 반 백년이 지난 그 때의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듯이 술술 풀어낸다. “정문규, 나, 이철이, 김영덕이가 함께 비구상계열 작품을 모아 전시를 했다. 그때 반응이 참 좋았어. 꼭 (선을)똑바로 그어야 하는 건 아니잖어. 좀 삐뚫게 그어도 튀어나와도 자유롭잖아” 당시 제작동인전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전시로 평가받았다. 그 후 매년 열린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에 참가하며 현대화가로 자리를 다졌고 각종 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 초대될 정도로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안산 대표 미술가 '장미화가 성백주'>  성 화백의 상징인 장미 그림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장미를 잘 그리던 황염수 화백과 친했어. 서울에 가끔 올라오면 그 분 댁에 머물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분 작업하는 걸 보다가 ‘선생님 나도 장미 한번 그려볼까요?’ 하고 물었지. 그 분 말씀이 ‘장미는 장미 것이지 내 것이 아니야. 당신이 보는 장미와 내가 보는 장미가 다르니 한번 그려보라’고 해서 나도 장미를 그려 봤는데, 그려놓고 보니 잘 팔려. 그래서 계속 그리고 있지”  한 화가가 60년 가까이 한 주제 잡고 끊임없이 그린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 그가 장미를 오늘도 그리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생각과 자연이 마주쳐서 생겨나는 에너지를 잡아 둔 것이야. 그 사물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 그림 속에는 조형성도 있고 그 사물이 주는 서정성도 담기지. 그림을 그리는 것 뿐 아니라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를 통해서도 자신만의 개성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인격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장미는 나를 끊임없이 성찰하도록 만들어 내가 순수한 인간으로 완성되게 만든다.”취재를 위해 찾아간 성 화백의 집안 곳곳에는 직접 그린 장미 그림이 벽면 가득 걸려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린 장미는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 송이 한 송이 예쁘게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림 속 색채와 리드미컬한 배치로 인해 장미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이 살아있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자신의 순수성을 갈고 닦는 활동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화백은 오늘도 캔버스 앞에서 수행하듯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성백주 화백이 안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90년대 후반. 작가도 정확한 연도가 기억나지 않는다. “안산에 오고 몇 년 지나서 제3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2000년)을 수상했으니 한 20년 즈음 되어간다”고 짐작한다. 평소 친했던 정문규 화백의 권유로 안산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그는 안산 첫 인상을 한마디로 ‘수목공기가 좋은 도시’라고 평가했다. “수목만 너무 많아도 안 좋아. 나무도 적당하고 공간 환해서 마치 외국 도시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안산에 정착한 후 좋은 일도 많았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도 받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두 자녀를 키워 모두 출가시키고 지금은 부인과 단 둘이 살고있다. 화백의 집, 볕이 잘 드는 방은 작업실로 사용 중이다. 화가의 작업실을 볼 수 없느냐 청하자 성 화백은 “우리집에서는 여기를 ‘도살장’이라 부른다”며 작업실로 안내한다. 완성한 작품과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작품, 이제 막 시작한 그림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그 가운데 화백의 의자가 자리잡고 있다. 모름지기 창작자란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성 화백. 혹시 ‘도살장’이란 의미는 어제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공간이라는 뜻이 아닐까? 노 화백의 한 마디가 마음을 울린다.“창작 작업은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행위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면 끊임없이 새 물을 채우면 된다. 잠시 더러워 졌던 마음도 새물을 계속 붇는다면 깨끗해질 수 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직접 그리는 행위도 우리 마음에 새물을 붇는 것과 같다. 좋고 옳은 것으로 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라”  <성백주 화백의 작업실. 성 화배근 이 공간을 '도살장'이라 불렀다.>  하혜경 편집위원  {동영상:https://youtu.be/1mxGTDmorC8}
    2018-09-13
  • 안산의 자부심 시리즈(1) - 청문당
    안산의 자부심 시리즈(1) - 청문당
    제457호(2018.8.22.) 조선시대, 안산에는 책이 넘치도록 많았다  ​안산은 책과 학문의 도시였으며, 문인들의 교류 공간이자 실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특히 민간 도서관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1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했던 청문당(현 상록구 부곡동 소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4호)이 대표적이며,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경성당도 상당한 장서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적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일부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전국 4대 장서각 중 2곳이 안산에 있었다.”는 학설이 오랫동안 전파되기도 했다. 안산의 청문당과 경성당 그리고 충북 진천의 완위각과 월사 이정귀의 고택(현 서울 명륜동 소재)이 조선시대 4대 장서각으로 꼽혔었다. 전국 각지의 문인과 묵객들이 모여들던 청문당청문당은 상록구 부곡동 가마골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수인산업도로 인천 방면과 영동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약 1km 정도 안쪽에 있다. 마을 뒤쪽에는 수리산의 지맥인 낮은 야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오천(午川)이 흐른다.진주 유씨의 세거지인 이곳에 청문당이 지어진 배경에는 조선 선조의 딸인 정정옹주가 있다. 정정옹주는 유적(柳頔)과 혼인하기로 약속했었으나 시아버지 유시행이 세상을 떠나자 혼인을 미루고 삼년상을 치렀다. 애초 유시행은 선산인 충북 괴산에 묻힐 계획이었으나 ‘서울에서 너무 멀고 왕가의 장지는 100리(40km)를 넘을 수 없다’는 법도에 따라 적당한 곳을 찾던 중 ‘살기 좋은’ 안산을 선택했다. 이후 정정옹주가 14세 때, 이번에는 아버지인 선조가 승하해 다시 삼년상을 치러야 했고 이후 1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혼인을 올릴 수 있었다. 이후 진주 유씨는 임금으로부터 받은 넓은 토지와 바닷가의 어업·염전권 등을 기반으로 안산에 세거하며 많은 인물들을 배출, 조선 후기 기호남인(畿湖南人)의 3대 가문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됐다. 특히 유적은 임금의 사위(부마)가 되었고, 조카인 유명견, 유명천, 유명현 등 3형제는 참판 또는 판서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청문당은 남인 문사들의 교류 장소였으며 나아가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 특히 1만 권의 책이 저장된 만권루가 중심이었다. 특히 강세황의 처남인 유경종은 청문당을 중심으로 ‘오천시사(午川時社)’를 결성했으며, 이곳에는 전국 각지로부터 문인과 문객들이 모여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부곡동 모임 ‘오천시사’에 대해서는 안정복, 채제공, 강세황의 시(詩)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기(記, 기록)·서(序, 서문)·발(跋, 발문)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청문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주거 및 정원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공간 구성은 물론 건축기법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건축문화재이다. 시, 체험프로그램‘ 청문당에서 조선시대를 바라보다’ 운영시는 지난 6월부터 오는 12월까지 △청문당 북콘서트 ‘현대인, 책과 음악에게 묻다’ △초등학생 대상 ‘화공(畫工)이 되어 만나는 강세황’ △자유학기제 연계 ‘만권루 스토리텔링 진로탐험’ △대학생 1박2일 ‘헬로, 청문당!’ △생생문화재 기획전시 ‘청문당 그리고 시·서·화’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유명천·유명현 형제가 공부하던 곳, 경성당경성당 또한 현재 부곡동에 위치해 있다. 경성당의 전면 안산 끝자락에 청문당이 위치하고 있으므로 원래는 종가인 청문당과 같은 영역에 있었으나 영동고속도로로 인해 지리적으로 단절됐다. 경성당은 19세기 중반에 진주 유씨 21세손인 유신(柳賮)의 아들 유중서가 둘째 아들 유방이 살림을 날 때 지어 준 집이라고 하며, 원래 서울 남산에 있던 서실의 당호로 진주 유씨 18세손 유명천·유명현 형제가 공부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유원성이 이름을 빌려와 이 가옥 사랑채의 당호로 썼다고 한다. 참고로 유명천은 공조판서·예조판서·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했으며, 유명현은 형조판서·이조판서·전라도관찰사 등의 경력이 있다. 경성당은 청문당에서 분가한 진주 유씨의 작은 종갓집으로 청문당과 함께 안산지역 사대부가의 주거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문화재이다. • 사진출처 : 안산문화원​   
    2018-08-23
  • 미술의 도시 안산 ⑥ 안산을 대표하는 현대화가 신성희 화백
    미술의 도시 안산 ⑥ 안산을 대표하는 현대화가 신성희 화백
    제457호(2018.8.22.) 회화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누아주’기법 만들어  <Peinture Spatiale>  죽음 상징한 찢겨 진 캔버스, 삼차원 세계로 엮어 살아나 ​‘미술의 도시 안산’이 소개하는 마지막 현대 화가는 누아주의 거장 신성희 화백이다. 앞서 소개한 현대 화가들이 안산이 신도시로 개발되는 1990년 무렵 안산으로 옮겨 와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화가라면 신성희 화백은 1948년 안산 수암동에서 태어나 안산초등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거쳐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다.‘누아주’(엮음)라는 미술 장르를 개척한 그는 세계 미술사에큰 발자취를 남긴 화가로 평가받는다. 2009년 서울 소마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도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그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영혼의 동반자였던 정이녹 여사를만나 신성희 화백의 삶과 작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故신성희화백>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갈구한 삶1969년 홍익대 회화과 재학 중 18회 대한민국예술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화단에 파란을 일으켰던 신 화백은 1980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뒤 ‘누아주’라는 독특한 형태의 미술 기법을 창안했다. 누아주라는 기법을 만들기까지 그의 작품활동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해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었다. 초기 작품은 실상과 허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회화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이뤄진 시기다. 69년 국전 특선 후 1979년까지 ‘마대작업’을 통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갈구했다.정이녹 여사는 “그는 작품을 통해 실상과 허상의 벽을 넘고 싶어 했습니다. 초기 마대작업은 회화 본질에 대한 탐구 단계로 실상인 마대 위에 허상인 마대 무늬를 그리는 작업을 주로 했습니다. 실상과 허상의 공존, 대비를 보여주고 싶어 했지요”라고 말한다.회화 근원을 찾고 싶은 갈망은 근대회화가 꽃피고 현대회화의 중심지가 된 프랑스 파리로 그를 이끌었다. ‘서양미술의 본고장 파리에서 내가 지금 어디쯤 와있는지 한 3년만 살아보자’ 고 시작한 파리생활. 3년이 30년으로 늘어나면서 그의 작품은 10년마다 더욱 정교해지고 혁신적으로 변해갔다.​  <정이녹 여사> ​꼴라주, 평면 세움, 누아주 기법회화 평면을 탈출하다파리에서 그의 작품은 판지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조각낸 후 재구성하는 꼴라주(collage) 형식으로 발전했다. 신성희 화백은 이 시기 자신의 고민을 “(화폭에)갖다 놓고 싶은 것은 대체로 3차원적인 형상인데 비해 놓여질 곳은 캔버스나 종이 같은 2차원의 평면이다. 이 두 개의 상반된 개념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1985년 10월 공간지 ‘입방체에 담겨진 회화’ 글 중에서)라고 털어놓았다.그의 고민은 90년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일정한 크기로 박음질해서 하나의 화면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평면세움 단계를 거쳐 누아주 기법으로 완성됐다.불어로 ‘맺기’ ‘잇기’라는 뜻을 가진 누아주는 엮거나 묶어 제작하는 장르를 통칭하는 단어가 됐다. 누아주 기법을 선보인 신 화백의 새로운 도전은 화단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평론가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원근법을 만들어 마치 평면을 공간처럼 보이게 했다면 신성희는 캔버스가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도록 찢고 묶어서 생명을 부여한다”는 극찬을 쏟아냈다.신 화백도 “나의 작업들은 찢어지기 위하여 그려진다. 찢어진다는 것은 이 시대 예술에 대한 질문이며, 그것이 접히고 묶여지는 것은 곧 나의 답변이다.(중략) 찢어진 그림의 조각들은 나의 인식과 표현의 대상들이 죽었다는 것의 증거물이다. 나의 두 손은 이 증거물들을 다시 불러 일으켜 바람이 오가는 빈 공간의 몸에 예측할 수 없는 신경조직을 새롭게 건설한다”(2001년 갤러리 현대 전시회 카달로그)고 말했다.​  "​논으로 달려가 개구리 소리 나는 곳에돌을 던져 팔짝 뛰어 오르면대나무 막대기로 단번에 쳐서 잡던,내 고향 안산에내 이름을 단 집을 하나 짓고 싶었다​"  ​30년 타국살이 고향 사랑도 깊어아들은 건축가로 딸은 의상 디자이너로 아버지의 작업 스타일을 이어가고 정 여사는 신 화백의 환희와 기쁨, 고뇌가 담긴 작품들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미국과 프랑스 스위스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갤러리 현대와 함께 Amoy(뉴욕), Fize(뉴욕, 시카고, 런던), FIAC(파리) Art Fair도 참가한다. 올해는 LA에 있는 Blum & poeGallery에서 개인전을, 10주기인 내년에는 국내 갤러리 현대에서 전시회도 기획 중이다.지난 2015년에는 그의 작품이 고향 안산을 찾아왔다. 단원미술관에서 ‘신성희 고향에 돌아오다’ 전이 열린 것이다.정이녹 여사는 “누구나 고향을 떠나 있으면 더 그립고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도 그랬던 것 같아요. 신 화백은 늘 ‘우리집 뒷마당이 향교와 맞닿아 있었고 담도 없었다’고 말했죠. 수락산(수리산)에서 고사리 뜯던 이야기, 산나물 캐던 이야기, 독수리 새끼를 풀숲에서 발견하고 닭장에서키우느라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 내려 놓고 곧장 앞 논으로 달려가 개구리 소리 나는 곳에 돌을 던져 팔짝 뛰어 오르면 대나무 막대기로 단번에 쳐서 잡던 이야기 등을 노래처럼 가락처럼 되뇌이곤 했지요”라며 작가의 고향 사랑을전한다.안산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거장으로 성장한 신성희 화백.정이녹 여사는 “신 화백이 남긴 숙제 중 하나가 고향에 그의 이름을 단 집을 하나 짓는 거에요. 그의 작품이 고향에서 오래오래 살길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안산과 신 화백은 어떤 모습으로 인연을 이어갈까? 찢고 자른 후 묶어 기어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그의 작품처럼 영원히 지속되길 기대해 본다.​  <안산 향교앞에서 찍은 신성희 화백(가운데) 가족사진>  하혜경 편집위원
    2018-08-22
  • 청포도가 익어가는 섬, 대부도… 국가대표 와인 ‘그랑꼬또’의 유혹에 빠지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섬, 대부도… 국가대표 와인 ‘그랑꼬또’의 유혹에 빠지다
    제457호(2018.8.22.) 은은한 황금빛에 과일향 물씬, 화이트 와인 ‘청수’ 인기… 해산물과 잘 어울려  ​바닷길을 가르며 12.7km를 달렸다. 해질 무렵 바닷바람은 시원했고, 산 너머 바다로 떨어지는 서해바다 석양은 붉디붉었다. 수도권 2천 만 명의 새로운 휴식처로 떠오르고 있는 대부도. 그곳엔,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있으며 또 시시때때로 다양하게 변하는, 석양빛을 꼭 빼닮은 와인 ‘그랑꼬또(Grand coteau)’가 있다. ‘대부(大阜,큰 언덕)’라는 이름 속에 ‘공(功)들이고 정(情)들이고 맛들인’ 국가대표 와인 ‘그랑꼬또’를 경험했다.​ ​안산시 지원으로 시작…이젠, 시 브랜드 이미지에 큰 기여대부도 와인의 역사는 최초로 포도나무 캠벨얼리 50주를 심었던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997년부터 대부도 농가들이 모여 공동으로 포도즙을 생산하던 중 2000년에 안산시 농업기술센터의 자문과 예산을 지원받아 그린영농조합(대표 김지원)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국산 와인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었다. 2001년 처음으로 와인을 생산해 2년 동안 숙성시킨 후 2003년 9월 ‘그랑꼬또’라는 브랜드로 세상에 내보냈다. 첫 해의 생산량은 2천 병, 국산 와인이 생소하던 시절이라 판매가 쉽지는 않았지만 우여곡절끝에 전량 판매가 되긴 했다.김지원 대표는 “당시 국내 와인시장이 크지도 않았고 국산와인은 더더구나 생소했다.”며 “와인에 대해 배울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100명 중 한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강행했고, 인내와 끈기로 버텼으며 이제 그 성과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실제 ‘그랑꼬또’는 최근 몇 년 전부터 국내외 각종 상을 휩쓸며 인지도를 높였고, 덩달아 매출도 크게 성장하고 있다. 2014년부터 3년 연속 아시아 와인 콘테스트에서 잇달아 은상을 수상한 데 이어 마침내 2017년에는 금상을 거머쥐었다. 특히, 지난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과실주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진가를 인정받았다. 매출도 안정적으로 늘었다. 2015년부터 공급하고 있는 광명동굴에선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으며, 최근에는유명 포털사이트 온라인 술 판매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이에 대해 김지원 대표는 “안산시의 지원으로 시작된 그랑꼬또가 이제는 거꾸로 안산시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며 “아시아와인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국내 유일의 와인이자 영어와 독일어로 소개될 만큼 세계적인 교류도 앞장서고 있는, 명실상부하게 한국 와인을 이끌어가고 있는 국가대표 와인이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김지원 대표>  ​미네랄 풍부한 토양과 해풍,천혜의 포도생산지 대부도‘그랑꼬또’의 성공은 양질의 포도와 김 대표의 노력이 융합돼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대부도는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과 비교적 강우량이 적은 뜨거운 열기, 서해안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적당한 습도, 낮과 밤의 큰 일교차 등 포도나무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조건(일명 테루아)을 모두 갖춘 천혜의 포도 재배지역이다. 거기에 김지원 대표의 와인에 대한 열정과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는 절박함이 더해져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대부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로 농협에서 근무했던 김지원 대표는 1993년에서야 농사를 시작한 늦깎이 농부였다. 포도 농사를 짓던 김 대표가 와인을 공부하며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초창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독일로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미국으로… 전 세계 어디든 와인이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그렇게 공부했고, 배운대로 써먹었으며, 더 나은 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했다.”는 김지원 대표. 그는 “와인 품질의 70%는 포도밭에서 결정되고 사람의 정성과 열정 그리고 좋은 기술이 30%”라고 단언하며 “이제 어디 내놔도 절대 기죽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자연 그대로의 정직한 맛과 향으로 세계에서 통하는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현재 사단법인 한국와인생산협회 회장인 김 대표는 공인된‘마스터 소믈리에(master sommelier)’이기도 하다. 이는 와인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알아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농업, 포도농사, 양조기술, 와인 테스팅 그리고 교육까지 모두 가능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극히 제한된 자격이다. ‘그랑꼬또’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또 하나의 요인인 것이다.​ ​요즘 대세는 ‘화이트’와 ‘스파클링’…청포도로 만든 ‘청수’ 인기현재 ‘그랑꼬또’는 레드, 화이트, 로제, 아이스 등 9가지 종류가 생산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최근에 개발돼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청수(靑水)’에 대한 기대가 높다. 청수는 농촌진흥청이 1993년 생식용 품종으로 개발한 청포도 품종으로 추위와 병에 강하며 당도가 20브릭스에 이를 만큼 높아 소​​믈리에들로부터 화이트 와인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대부도에서 직접 농사지은 청포도로 와인을 만들고 있는 김지원 대표는 “은은한 황금빛에 과일향이 물씬 나는 청수는 절제돼 있으면서 다양하고 풍부한 과실의 아로마가 뛰어나고 세련된 청량감을 포현하며 유질감과 미네랄이 동시에 은은하게 느껴진다.”며 “차갑게 드시면 더욱 좋다.”고 설명했다.전문가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장인 고재윤 경희대 교수는 “과일향이 풍부하며 산뜻하고 가볍다. 깔끔하다. 알코올, 산도, 당도, 향 등의 밸런스도 탁월하다. 생선회, 생선요리, 게찜, 대하 등과 어울린다.”고 평가했다.김지원 대표는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고 있다. 올해부터 조합원들로부터 전량 구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약 100톤 규모의 포도를 등급제를 통한 공개수매로 구입할 계획으로, 점차 노령화되어 가고 있는 농촌의 현실에서 노동력은 줄이면서 소득은 보장될 수 있는 양조용 재배방법을 보급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또한 앞으로 품목 수는 줄이고 가격 경쟁력은 높이는 선택과 집중 전략도 계획하고 있다.김 대표는 “현재 외국산이 95%를 차지하고 있는 와인 시장을 20년 이내로 외국산 50% 대 국산 50%로 맞추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2세대도 키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안정된 기업체를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문의 : 그린영농조합(032-886-9873) ​ 
    2018-08-22
  • 미술의 도시 안산 ⑤ 미술관 열고 관객과 소통하는 안산의 대표화가 ‘정문규’
    미술의 도시 안산 ⑤ 미술관 열고 관객과 소통하는 안산의 대표화가 ‘정문규’
    제456호(2018.7.25.) 죽음의 고비 넘어서 생의 찬미 아름다운 색채로 표현  ​안산을 대표하는 현대화가 그세 번째 주인공은 정문규 화백이다. 1934년 경상남도 진주 출신인 정문규 화백은 1990년부터 안산에 정착해 작품활동 중이다. 2009년 안산시 대부도 선감동에 ‘정문규 미술관’을 개관한 후 매년 정기 전시회와 매달 음악회를 개최하며 관객과 활발한 소통을 이어가는 미술가. 이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정문규 화백. 그의 삶 발자취를 따라 작품세계를 들여다봤다.​   ​그림 잘 그리던 학동, 교사를 거쳐 화가가 되다“초등학교 5학년 때 전쟁을 피해 시골로 이사를 갔지. 학교에서 어느 날 일본하고 미국하고 전쟁하는 그림을 그려오래서 어린 나이에 일본이 하와이에 가서 폭격하는 장면을 그려갔는 데 일본인 교장이 깜짝 놀랐나 봐. 전교생을 모아놓고 이 학생은 훌륭한 화가가 될 거라고 칭찬을 하는 바람에 온 동네 소문이 다 났지. 화가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꿀 시기였는데 그 사건 덕분에 부모님이 화가가 되는 걸 반은 승낙한 셈이 됐다”그의 재능을 알아본 일본인 교장의 한 마디는 그의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됐다. 진주 사범대학에 입학해 교사로 평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화가가 되고 싶은 열망을 꺽을 수 없어 홍익대학교 회화과로 진학해 미술공부를 이어갔다.초기 정문규 화백은 한국의 자생적인 추상 미술에 몰두했다. 황토색, 갈색, 흰색 등 한국의 민족적 색채로 흙을 형상화하는 색채와 독자적인 질감을 표현하려 했다. 당시 미술계의 흐름인 반 아카데미 반 앵포르맬 정신이 그의 초기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조선 백자의 소박미 누드로 표현정 화백의 그림 세계는 1968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벽화연구실에 유학 한 후 새롭게 변화했다. “고대나 중세에 걸친 벽화에서 휴머니즘을 느낀 후 절제된 색채와 면도칼을 이용한 스크래치 법을 사용해 개성적인 화면질(마티에르)을 추구했다. 누드를 그린 EVE 시리즈는 색채는 빼고 조선 백자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업이었다”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20년간 지속된 그의 그림 세계는 1992년 위암 선고와 투병을 딛고 난 후 다시 한 번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위암 3기 진단한 의사는 수술을해도 살아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말했다. 의사를 설득해 수술을 받고 오랜 투병생활 끝에 결국 건강을 되찾았다. 정말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으니까 살아난 거에 대한 감회가 깊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 때부터 그린 그림은 작품 사이즈가 커지고 다양한 색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생의 즐거움 기쁨을 전달하고 싶었다”정 화백이 투병 생활을 위해 선택한 도시가 안산이었다. 바쁜 도심보다 한적한 동네가 좋아 안산으로 이사 고잔신도시 대림아파트에 거주하다 2006년 선감도에 ‘정문규 미술관’을 지어 이사했다.​  ​미술가는 아름다움을 알리는 예술선교사해수탕 건물을 인수해 미술관으로 꾸민 ‘정문규 미술관’은정 화백의 작품활동과 휴식, 전시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1층엔 음악을 좋아하는 그와 아내(이영선 여사)를 위해 클래식​​카페 아르페지오가 만들어졌고 2층엔 기획전이 열리는 제1전시관을 만들었다. 3층은 정 화백의 개인작품을 전시한 제 2전시관과 화백의 작업실로 꾸몄다. 정 화백 부부는 4층에 살고 있다.정문규 미술관은 개관 후 1년에 2회 이상 기획전을 개최하고 매달 음악회를 열어 벌써 100회를 훌쩍 넘어섰다. 후배 작가들이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관객과 소통을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만드는 일. 조금은 번거로울 수 있는 일을 그가 꾸준히 진행하는 이유는 뭘까?“선교사가 종교를 알리듯이 예술가는 예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인지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얼마 전 한국 현대화가 1세대인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85억에 경매됐다. 왜 그 작품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알게 된다면 우리의 미술을 통해 느끼는 행복은 그만큼 커질 것이다”​  ​관객과 호흡하며 소통하는 화가,음악회 기획전시회 열어예술의 아름다움, 예술이 전하는 행복의 크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정 화백. 그는 올 여름에도 기획전과 음악회를 준비 중이다. 오는 9월에는 진짜보다 더 똑 같은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기획전시가 준비 중이며 7월 28일과 8월 11일에는 음악회가 열린다. 7월 28일은 소프라노 조혜진과 작곡가 강한뫼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옛가곡과 신작가곡들’이 무대에 오르며 8월 11일은 베를릴필하모닉 비올리스트로 활동 중인 박경민씨가 정문규 미술관을 찾아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관객들을 만난다.요즘에도 이른 새벽이면 아뜰리에 내려와 다섯 시간 이상작품을 그린다는 정 화백. 올 여름 정문규 미술관을 찾아 안산의 대표 화가와 소통하고 예술로 교감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2018-07-25
  • 안산 시장에게 바란다!
    안산 시장에게 바란다!
    제456호(2018.7.25.) ​“가족 같은 시장이 되셔서 즐거운 도시 안산을 만들어주세요”윤화섭 민선7기 안산시장이 발표한 ‘시민과의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됐다.7월 2일 첫 걸음은, 폭우와 태풍에 대비하기 위해 공무원들이 비상근무 중인 안산시청 재난상황실로 향했다. 간단한 취임선서가 있었고, 시민 대표들이 나서 소중히 적어 온 편지글을 읽었다. 이후 윤화섭 시장은 상록구청, 단원구청을 포함해 25개 동 행정복지센터를 순차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청취하기 위한 보드가 마련됐다. 많은 기대와 소망이 담긴 글들이 쏟아졌다. 간추려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윤화섭 시장님의 취임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이 자리에 초청되어 시장님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선한 영향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쁨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안산시민의 한 사람으로 끝까지 그리고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안산시 장애인 여러분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선 까닭은 시장님께 축하의 말씀과 함께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요청 드리고자 함입니다.집 안에서만 살아가는 장애인이 무려 70퍼센트가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외출이 무섭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거나 혹은 비장애인과 자신이 외관상 달라 보이니 그들의 관심조차도 두려워 집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대할 때는 미안한 마음, 안쓰러운 마음,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나친 호의로 다가가서 서로 경직되고 부담스러우실 때가 많으실 겁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비장애인이 우리를 바라볼 때 장애에 대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바라볼 때부터 진정한 평등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들을 보시면 무엇을 해줘야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세요. 그들이 도움을 바랄 때 자연스럽게 도와주시면 됩니다.시장님께서도 이런 자연스러운 도움이 이루어지는 안산시를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연스러운 도움이 있을 때 장애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나와 우리 이웃들이 함께 어울리며 사는 가장 잘 나가고 행복한 안산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시선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2년 전부터 장애인 인식교육 강사로 초중고 학교에서 강사 활동을 하고 있으며, 또한 여성 최초로 보험 설계사로도 열심히 활동하는, 한 엄마 한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두서없는 이야기끝까지 들어주신 윤화섭 시장님과 청중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 번 시장님의 취임식을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감사합니다. - 장애인 대표 최경분​   ​“수고하셨습니다. 당신은 국가대표입니다.” 이 말은 끝가지 포기하지 않았던 축구대표팀에게 우리 국민이 보내준 응원메시지입니다.“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안산시장입니다.” 이 말 또한 안산시민이 당신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존경하는 안산시민 여러분! 윤화섭 시장님과 내빈 여러분! 새로운 희망과 함께 민선7기를 시작하는 오늘, 뜻깊은 자리에 서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딩동딩동” 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딩동딩동”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벨이 울릴 때마다 누런 봉투에 들어 있는 옛날식 또봉이 통닭 반 마리, 검정 비닐봉지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 한 통. 또 어느 날은 곰취 나물, 또 어느 날은 삶은 옥수수. 벨만 울리고 사라지는 윗층에 사는 키다리 아저씨. 참으로 소박하고 정이 많은 그리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 나의 이웃, 그 사람은 윤화섭이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현관 앞에 쌓여 있는 눈을 치우는 이웃이며, 말라버린 철쭉을 뽑아버리고 손수 사철나무를 사다 심는 듬직한 사람이 바로 윤화섭 시장님입니다. 오늘 윤화섭 시장님 취임식을 ‘시민과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정했듯이 사람중심, 안산시민을 위해 일하는 시민시장이 되어 주시길 부탁드리며, 시민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응원합니다. 시장님과 여러분들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행복한 안산, 살맛 나는 생생도시 안산! 감사합니 다.  - 시민대표 허병순​   ​윤화섭 시장님께.먼저 임명된 시장님께 축하 말씀 드립니다. 제가 2014년 한국에 와서 안산에 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안산의 첫 이미지는 경치가 아름답고, 사람들도 배려심이 있고, 좋은 점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무엇보다 인류의 정신 식량인 도서를 자유롭게 빌려 읽을 수 있는 점 때문에 안산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선부동에 있는 안산글로벌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도움을 많이 받고 한국생활을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산은 저희 이주여성들의 제2고향이고 앞으로 평생 함께 살게 될 곳이기 때문에 항상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임명된 시장님께 바라는 몇 가지 부탁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4살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은 부모는 아이들의 성장 과정 중에 필수적인 영양제이고, 건강한 가정 분위기에서만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도움을 주고 있지만 한국 엄마들보다 자녀에 대한 부모교육이 많이 필요합니다. 또한 저희 이주여성들이 이국 문화 차이를 겪고 있는 동시에 육아를 하면서 자신도 재빨리 한국생활을 적응해야 하고, 자신의 자아실현도 이루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산에서 여전히 결혼이민자들은 차별 받고 있습니다. 공무원, 학교선생님, 일반시민에게 다문화이해교육, 인식 개선도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는 이주여성들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셨으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시장님께서 말씀하셨던 ‘생생 도시 살맛 나는 안산’ 청사진에 다문화 가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장님께서 건강하시고 모든 일을 순조롭게 풀어나가시기 바랍니다.(最后, 祝愿新市長 身體健康, 萬事如意!) -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살고 있는 쑤이준홍 ​ 
    2018-07-25
  • 미술의 도시 안산 ④  안산을 대표하는 ‘김홍도축제’ 올 10월 개막
    미술의 도시 안산 ④ 안산을 대표하는 ‘김홍도축제’ 올 10월 개막
    제455호(2018.6.27.) ‘2019 안산 방문의 해’ 관광객 손짓  해학과 풍자, 김홍도 정신이 살아나는 축제를 그린다  ​보령 머드축제, 함평 나비축제, 화천 산천어축제 등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가 지역경제를 살리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난 해 보령 머드축제장에는 외국인 관광객 62만 명을 포함해 568만여 명이 방문했으며 지정기부금, 입장료 수입, 화장품 판매를 통해 15억 2천여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사단법인 한국문화관광포럼은 2017 보령 머드축제의 생산유발 효과는 996억 원, 소득유발효과는 181억 원의 효과를 거뒀다고 분석했다. 정말 ‘잘 키운 지역 축제 하나 열 기업 부럽지 않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보령 머드축제처럼 안산을 대표하는 지역축제, 안산이 보유한 문화예술자원을 활용하면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안산시는 ‘2019 안산 방문의 해’를 맞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화랑유원지 단원각 앞에서 ‘안산 김홍도축제’를 기획 중이다. 조선후기 천재화가 김홍도, 그의 해학과 풍자가 담긴 그림을 깨워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즐기는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계획이다. 미술의 도시 안산을 대표할 ‘김홍도축제’ 이야기다. 왜 ‘김홍도축제’ 인가?안산을 대표하는 지역 축제 왜 ‘김홍도’여야 할까? 역사와 미술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화가 ‘김홍도’. 그는 우리나라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풍속화가이며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국가 공인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의 고향이 안산이었으며 성장기 주로 활동한 무대가 안산이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지만 정작 안산에서는 ‘화가 김홍도’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김홍도의 호를 딴 ‘단원구’ ‘단원미술관’등이 고작이다.김홍도축제 전문위원이면서 20년 넘게 김홍도를 연구한 김홍도연구회 전득준 회장은 “김홍도 선생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 출신인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단원의 스승이었던 강세황 선생의 기록에 ‘젖니 갈 무렵부터 그림을 가르쳤다’는 글을 근거로 안산일 것으로 추정했는데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안산과 연결고리가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 학계에서도 김홍도의 출신지가 안산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정도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김홍도가 사용했던 호 ‘서호’ ‘단구’ ‘단원’ 이 안산의 지명이나 모임의 이름이었으며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바닷가 생물과 생활풍습은 당시 어촌이었던 안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홍도의 고향이 안산이지만 정작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안산 사람들은 많지 않다.전득준 회장은 “사실 이제야 안산시가 ‘김홍도’를 도시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은 많이 늦은 편이다. 이순신 장군이 ‘우리에게는 아직 13척의 배가 남았다’고 말하는 그 마음처럼 김홍도 선생이 남긴 유산을 마지막 13척 배 삼아 축제를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홍도 축제’ 어떻게 진행될까?중인의 신분으로 태어나 현풍현감까지 지냈던 화가 김홍도. 안산시가 준비하는 ‘김홍도축제’는 김홍도의 그림 속에 담긴 해학과 풍자는 물론이거니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까지 담아낼 예정이다. 김홍도축제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차례 열리다 끊어졌는데 당시 축제 감독을 맡았던 김용호 화백(한국미술협회 사무처장)이 올해 축제사무국 전문위원으로 참여 ‘김홍도의 부활’을 지휘한다.김 화백은 “이번 축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김홍도 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시민들이 참여하는 마당을 만드는데 주력할 예정이다. 김홍도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200년 전 화가가 그림으로 전하고자 한 이야기를 지금의 시각에 맞게 풀어 낸다면 역사와 미술을 배우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행사장이 될 화랑유원지 단원각 앞 정원은 지난해 가을 ‘경기정원문화박람회’에서 ‘한국의 정원’으로 꾸며 졌던 곳으로 조선시대 생활상을 재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김 화백은 “지금은 담장만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이 한국적인 담장을 모티브로 김홍도가 살았던 그 시대를 재현해 내고 나아가 풍속화 속 등장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한마디로 그림과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축제는 매년 김홍도의 그림 중 하나를 주제로 선택해 스토리를 꾸며갈 예정인데 첫 대회인 올해의 그림은 ‘노상송사(路上訟事)’다. 억울한 사람이 고을 원님의 행차길을 가로 막고 탄원을 하자 원님이 즉석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주제로 마당극이 만들어지고 관람객들과 즉석에서 송사를 재현하게 된다. 축제 행사장에는 장터마당, 놀이마당, 농업마당, 교육마당 등 30여개의 관광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김홍도 골든벨, 풍속그리기 사생대회, 동상마임, 우마체험, 서커스, 전통음식체험, 프리마켓, 승마체험 등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로 가득 찰 예정이다.   지역 대표축제 성장위한 발판 마련김홍도축제는 단순히 일회성 축제로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안산시가 ‘2019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되면서 확보한 국비 지원금이 축제의 ‘마중물’ 역할을 하고 축제 운영을 위해 축제사무국까지 꾸렸다. 축제사무국 박종홍 관광정책팀장은 “세계적인 축제로 도약한 국내 지역 축제도 시작은 미미했다. 하지만 축제가 거듭될수록 전문가의 컨설팅과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관광객이 찾아오는 축제를 만들었다. 안산의 김홍도축제도 다문화 인적자원과 결합해 나가다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축제의 성패 여부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안산에서 부활한 천재화가 김홍도가 국내를 넘어 세계인의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번 축제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 하혜경 편집위원◇ 문의 : 안산시 관광과(031-481-3059)​    
    2018-06-27
  • (기획) 안산 캠핑장 소개 : “올 여름, 대부도에 가서 캠핑하자! 붉은 노을과 함께!”
    (기획) 안산 캠핑장 소개 : “올 여름, 대부도에 가서 캠핑하자! 붉은 노을과 함께!”
    제455호(2018.6.27.) 산과 바다가 공존하고 소나무와 파도가 함께 논다… “없는 게 없다”   ​“산을 넘나 싶었더니 어느덧 나타나는 바다.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먼저’ 취하고하얗게 인사하는 파도, 붉게 물든 노을에‘ 맘껏’ 취한다”어느 사보에서 소개된 캠핑장 기사의 한 대목이다.대부도가 그렇다. 꼭 그렇다. 산과 바다, 소나무와 파도그리고 붉은 노을까지 한데 어우러진 대부도의 캠핑장을 소개한다. 현재 안산시 관광과에 등록된 캠핑장은 총 9곳. 단원구 초지동(동산로 268)에 위치한 안산화랑오토캠핑장을 제외하면 모두 대부도에 있다. 안산화랑오토캠핑장은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으며, 80개에 달하는 일반 야영장뿐만 아니라 카라반 4대와 글램핑장 1곳까지 갖추고 있어 많은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다만, 온라인 예약의 경쟁률이 높아 일정을 맞추기가 싶지는 않은 편이다. 나머지 8곳은 대부도 전역에 펴져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대부남동에 5곳이 있어 가장 많고, 대부동동과 대부북동, 선감동에 각각 한곳씩 운영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옆쪽의 지도를 참고하면 된다. 대부분의 캠핑장은 일반 야영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많은 곳은 20면을 보유한 고래숲관광농원이다. 카라반랜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반 야영장보다는 카라반에 집중해 현재 18대를 보유 중이며, 핀란드캠핑장에도 3대의 카라반이 있다. ‘화려하다(glamorous)’와 ‘캠핑(camping)’을 조합해 만든 ‘글램핑(glamping)’도 인기다. 필요한 도구들이 모두 갖춰진 곳에서 안락하게 즐기는 캠핑을 뜻하며 씨엘관광농원(12동)과 대부도캠핑성(10동)이 성업 중이다.​   <글램핑장 체험기>하늘에 닿아 있고, 하늘을 닮고 싶다​.퇴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출발해서인지 도로 사정이 편안하다. 최근 개통된 도로로 시원하게 달리다보니 어느덧 시화호다. 20여 km에 달하는 연육교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커져 가고 조각조각 떠다니는 작은 어선들의 ‘만선(滿船)의 꿈’은 내 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에 지쳐갈 즈음, 몸은 강렬하게 치유를 원하고, 그때 밖에서 하룻밤 쉬는 캠핑은 맞춤 해법 중 하나다.캠핑장에 도착하니 먼저 출발한 동료들이 그릴에 고기를 굽고 있다. 직접 키운 다양한 쌈채소에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 한 점 올리고 마늘에 쌈장까지 준비 완료. 한 손에 들려 있던 술 한 잔과 함께 입에 털어 넣는 순간, 세상은 행복의 물결로 넘쳐나고 때마침 산 너머 바다로 떨어지는 저녁 해는 사방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인다. 덩달아 나와 동료들의 얼굴도 불그스레 변해가며 웃음꽃이 피어난다. 술잔이 여러 차례 돌고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쯤, 몇몇 동료들은 족구장으로 몰려가 공놀이를 한다. 비록 술기운에 평소 실력만큼 잘 하지는 못하지만, 헛발질도 실력인양 맘껏 뽐내고 바라보는 이들의 웃음소리는 석양에 실려 먼 곳으로 달아난다. 족구장 옆 시원스레 꾸며진 수영장의 푸른빛은 노을과 대조돼 더욱 더 푸르다. 울긋불긋 노랑 빨강의 보트와 물놀이 기구들이 손 내밀며 유혹한다. ‘한여름 밤 무더위는 나와 함께 물리치자’고.대화가 밤늦도록 이어지며 하나 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다른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주변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세탁기가 마련돼 있는 화장실은 깨끗했고, 100명이 동시에 씻을 수 있는 샤워실은 거대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더러워질 것 내일 한꺼번에 씻으면 되지’라는 가당찮은 핑계를 대며 샤워실은 패스. 글램핑장 안으로 들어오니 둘이 잘 수 있는 퀸 사이즈 침대와 함께 혼자 잘 수 있는 싱글 침대도 놓여 있다. 옆에는 화장대도 있어 여성 이용객들이 편할 것 같았고, 냉장고에 에어컨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는’ 구조다. 하루 종일 시달리며 방전을 앞두고 있는 휴대폰을 충전해 소생시키는 작업이 우선이다. 침대 머리맡에 안경을 벗는 것으로 오늘을마감한다.아침 6시. 지저귀는 새들의 웃음소리 사이사이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두런두런 일어나 내려졌던 글램핑장 지퍼를 올리고 다시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어젯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뜨겁게 헤어졌던 붉은 해는 여전히 붉지만 새로운 얼굴로 어제의 내일인 오늘을 만들고 있다.지난밤 치열했던 상황들을 고스란히 얼굴에 남긴 동료들이 하나 둘 모이고, 어제 못 다했던 이야기를 나눈다. ‘집나오면 고생’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글램핌장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느껴지는 피로감은 덜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부도 ‘맛 집’에 들러 해장국을 나누는 것으로 이번 체험기는 끝.   
    2018-06-27
  • 미술의 도시 안산 ③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장성순’
    미술의 도시 안산 ③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장성순’
    제454호(2018.5.30.)  ​보이는 것 그 너머를 표현하는 ‘추상화’에 평생 바쳐작품 200여 점 안산시 기증 … 안산의 화가로 사랑받길​ ​예술가와 도시는 어떤 관계일까? 예술가에게 영감과 재능을 심어주는 여신 뮤즈처럼 도시라는 공간도 예술가와 끊임없이 기운을 주고받으며 창작활동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도시는 예술가, 특히 화가에게 샘솟는 영감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뮤즈다. 고흐를 떠올리면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는 프랑스 아를지역이 떠오르고 작곡가 윤이상과 통영의 바닷가 풍경이 함께 생각나듯이 언젠가 ‘추상화가 장성순’ 하면 ‘안산’을 떠올릴 날이 오지 않을까? 1990년 안산으로 이사와 작업실을 열고 마치성실한 노동자처럼 매일매일 작품을 그려온 장성순 화가.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추상화가 장성순 화백을 소개한다. 남종화가의 거목 허백련에게 그림 배워함경남도 함흥출신인 장성순 화백은 어릴 때 심한 중이염을 앓고 왼쪽 귀 청력을 잃었다. 함흥의 갑부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화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당시 유명한 시서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2년 반 집에서 묵었던 남종화의 대가 허백련 선생과의 만남은 그가 화가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 화백은 한 대담집에서 “허 선생님과 매일 같이 지내다 그림을 좋아하게 됐어요. 허 선생님이 가끔 나에게 붓을 쥐어 주어 그리게 하면서 가르쳤어요. 그림에 눈을 뜬 건 그때였죠”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유년의 행복했던 추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7년격동의 세월에 태어난 화백의 삶이 평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세 차례의 전쟁을 마주해야만 했던 역사적 현실과 청력을 잃어가는 개인적 시련은 그를 내성적이며 사색이 깊은 청년으로 자라게 했다. 우리나라 5대 고보 중 하나인 함남중학교(함흥고보) 졸업 후 맞이한 해방. 해방은 장 화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넉넉했던 살림은 오히려 죄가 되어서 아버지와 함께 감옥살이를 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긴 후 남쪽으로 도망쳐왔다. 우리나라 추상 미술의 대표 주자로 성장감수성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장 화백에게 미술은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며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당시에는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가 없었다. 입학한지 1년 만에 장애를 이유로 학교로부터 퇴학처리 된 후 그림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미술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뎃생과 유화를 공부했다.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힌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화가 그룹의 리더로 성장했다.1956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추상화가들의 모임인 ‘현대미협’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장 화백이었다. 당시 젊은 화가들끼리 모여 ‘현대미협’을 창립하고 ‘현대미협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는 우리나라 미술화단에 추상화를 소개한 대단히 획기적인 전시회로 평가 받고 있다. 현대미협을 창립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장 화백은 “사실적인 그림에서 조금 벗어나면 무조건 국선에서 낙선 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죠…. 거창하게 추상화를 하자고 해서 만든 게 아니라 기존화단에 대한 대항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젊은 작가들의 도전은 당시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성순이라는 화가의 존재를 알린 계기가 됐다. 장화백은 196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파리비엔날레(1961년) 도쿄비엔날레(1967년)에 작품을 출품했다. 당시 그가 출품한 작품은 모두 엥포르멜풍 작품으로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평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미술 ‘추상’ 그림을 좋아하고 감수성 예민하던 청년이 3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성장하고 또 귀까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찾아가는 그림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을까?미술 평론가들은 장성순이 작업의 초기부터 일관되게 추상작품을 고수하여 나아감으로써 전통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시각화한다든지, 이성과 논리보다는 직관과 감각에서 출발하여 순수 추상의 결정체에도달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돌의 거친 표면을 보면 내 나름대로의 이미지가 보이고 그걸 그리고 싶었다”는 장 화백. 한 평론가는 그의 그림에 대해 “외곽의 프레임이 마치 그리스시대의 석비(石碑)를 연상시키면서 장성순이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왔던 돌이라는 오브제가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다”고 표현했다. 지난해 작품 207점 안산시에 기증장성순 화백은 1990년 안산으로 이사와 30년 가까이 안산에 살고 있다. 장 화백의 딸 지영 씨는 아버지이며 존경하는 화가인 장성순 화백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녀가 홍익대학교에서 예술기획학을 전공한 것도 아버지의 삶을 재조명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평생 동안 추상화를 그려온 ‘장성순 화백’을 주제로 논문도 준비 중이다. 장지영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성실한 노동자다. “아버지는 정말 성실한 분이셨다. 가족을 위해 가장의 역할도 충실히 하셨지만 화가로서의 삶도 그랬다. 꾸준히 개인전을 여시고 매년 단체전에 출품을 하시는 등 작가로 정말 열심히 사셨던 분이다. 작품을 하실 때는 런닝 차림으로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캔버스와 씨름을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는 장지영 씨.장 화백은 지난 2017년 작품 207점을 안산시에 기증했다. 유일한 상족자인 지영 씨의 역할이 컸다. 장지영씨는 “아버지는 늘 안산이라는 도시를 참 좋아하셨어요. 안산에 온 후 작품이 더 잘 그려진다고. 이 도시와 잘 맞는 것 같다시면서 이사하신 걸 참 잘했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고잔동에 있던 아뜰리에를 정리하니 아버지가 평생 그린 작품이 한 500여점 되는 것 같아요. 작품을 기증한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어요. 앞으로 아버지의 작품이 안산시민들에게 사랑받도록 안산시가 노력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혜경 편집위원​  
    2018-05-30
  • 경기창작센터 신규 입주작가 전시회 개최
    경기창작센터 신규 입주작가 전시회 개최
    제454호(2018.5.30.) <공인되지 않은 담론자들> 예술에 대한 사회통념적 해석 ‘저항’  ​경기창작센터에 새로 입주하는 20명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 ‘공인되지 않은 담론자들’이 6월 24일까지 센터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이 전시의 제목인 ‘공인되지 않은 담론자들’은 예술가가 예술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근원적 개별성’을 획득하기 위해 사회 통념적인 해석들에 저항하고 기존의 지식이나 관념안에 자리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균열과 간극들로 공통되지 않는 자리를 만들면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전시 관계자는 설명했다.관계자는 또, “예술가들은 타자와의 내밀한 차이를 잃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개개인의 특이성과 무한히 분별 되는 가능성을 놓지 않으려고 기꺼이 고독과 외로움을 친구 삼는다.”라며 이번 전시에 참여한 예술인들이 가지는 창조의 고충을 대변했다.그러면서 “역동적인 변화들이 끊임없이 교차 발생하는 동시대 예술 환경에서 자신만의 소통방식과 예술적 실행들을 묵묵히 펼쳐온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서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진다.”라고 덧붙였다.이번에 예술가들은 입주하는 동안에 다양한 전시와 강연, 워크숍 등을 함께 하면서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는 동시에 각각의 역량을 개성 있게 키워나갈 기회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경기창작센터는 국내 최대 규모의 레지던시 (예술가들의 예술창작과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곳)로서 그동안 국제적 감각이 스며든 지역특화 프로그램을 제공해왔다. 올해는 분야마다 더 집중적인 프로그램을 예술가들에게 지원하고자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여러 방면의 시대적 쟁점들을 고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표현한 예술가들을 선정하였다. ◇ 문 의 : 경기창작센터(032-890-4820)이선희 명예기자_iamyou70@hanmail.net​ 
    2018-05-30